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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잔느 승동표 선생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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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2001년 07월 08일 (일)
 
 
승동표 선생은 1918년 9월 14일 평안북도 정주군 대전면 운전동 60번지에서정미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승기효씨와 어머니 김효순씨의 4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한 것은 1933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 미술부 활동을 시작 하면서부터다. 그는 이 학교 재학시절 미술 뿐만 아니라 유도, 복싱, 스케이팅에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 학교대표선수로 활동하는 등 일찍이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당시 오산학교에는 우리나라 서양화의 선구자로 알려진 임파 임용련 선생이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임선생의 지도를 받은 승군은 1936년 제1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면서 재능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승군을 주목했던 임 선생은 이중섭과 마찬가지로 승군에게도 일본유학을 권유했고, 승군의 일본유학시절 스승의 예감대로 천재성을 발휘한다. 그는 동경 일본미술학교 서양화과 본과에 재학중 전조선미술전람회에 2회 연속 입선,일본 독립미술전에 3회 연속 입선이라는 기염을 토한다. 1941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1942년 평북 정주 구릉학원과 신의주공립고등여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 해방을 맞는다. 이후 1946년부터는 스승인 임용련 선생의 후임으로 모교인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였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월남한다. 그는 평남 진남포 부두에서 오산학교 제자인 한국군 장교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동료교사인 이희균 선생(전 전북대 영문과 교수)을 만나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 도중 정읍에서 남편과 함께 월남한 여동생 승표실과 재회,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북에 정착하며 남한에서의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승 선생의 첫 임지는 남원농업학교(남원농고 전신)다. 이때가 월남한지 4개월만인 1951년 5월이다. 남원에서 그해 11월 정읍중으로 전근한 승 선생은 이 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미술부를 창설한다. 제자들은 이때 선생이 훈육주임도 맡았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선생의 화려한 경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제자들에 따르면 선생은 40여년 동안을 전북지역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한 번도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력을 밝힌 적이 없다고 한다. 김영재 전 전북대인문대학장은 “당시 교무실에 걸려있던 선생님의 그림이 눈에 선 하다”며“그러나 선생님이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미술을 개척하신 분인지는 미처 몰랐다”고 말했다. 정읍중학교 외에도 줄포중, 정읍여고, 용담중, 고산중에서 교감과 교장으로 근무하신 승 선생은 지난 96년 4월 5일 그렇게도 그리던 평북 정주 땅을 끝내 다시 밟지 못하고 6년 앞서 세상을 떠난 부인 조공순 여사를 따라 영면했다. 유족으로는 수관, 수근, 수종 형제를 두었으며, 유작으로는 서양화 완성작 91점과 미완성작 1점을 남겼다. 선생이 북쪽에서의 행적을 밝히지 않았던 것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선생의 생애를 연구하고 있는 이용엽 선생(도전 서예분과 운영위원장)은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연민과 당시의 시대상이 선생의 입을 꼭 다물게 한 직접적인 원인인 것 같다”며 “하지만 선생의 선비다운 인품도 행적을 드러내지 않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승동표 선생의 화려했던 과거는 작고 이듬해인 1997년 5월 ‘오산미술 90년전’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때를 같이하여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그의 행적을 추적하게 됐고 마침내 ‘다시 찾은 근대미술’전에 선생의 유작 3점을 선보이게 됐다. 이번에 후손들이 공개한 작품은 이 때 선보인 작품과 미완성작품 1점을 포함 총 92점이다. /이란우 기자 ran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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