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승동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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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시설인가. 일견 말도 되지 않는 발상이다. 무덤은 망자의 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무덤 앞에서 자신이 살아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무덤은 굳이 망자만의 공간이라기보다 생존자를 위한 시설일 수도 있다. 역설적 표현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기억한다. 아니, 기억해야 한다. 기억의 한 방편으로 무덤도 활용한다. 특히 위대한 인물일수록 무덤의 상징성은 커진다. 연대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꺾어진 해’를 기념하고자 한다. 작고 몇 주기, 혹은 탄생 몇 년. 고인에 대한 아쉬움은 꺾어진 해에 대하여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승동표 화가. 1918년생. 그래서 2018년은 승동표 화백 탄생 100주년의 해, 바로 꺾어진 해이다. 이를 위해 승동표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다시 반추하는 일은 의미 깊으리라. 특히 작가 생애에 화단활동을 하지 않고, 즉 은둔자 생활을 하면서, 다수의 작품을 남긴 경우, 이렇듯 각별한 의미를 자아내고 있다.

(1) 승동표, 그는 누구인가

운봉(雲峰) 승동표(承東杓, 1918-1996), 그는 평북 정주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1933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승동표의 오산 시절, 선배로 이중섭과 문학수, 후배로 김창복 등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은 미술교사로 임용련(任用璉, 1901-1950)이 막 부임한 직후였다. 임용련/백남순 부부화가와 이중섭 등이 있는 오산시절, 그것은 환상, 그 자체였을 것이다. 때문인지 승동표는 재학중에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1936)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제2회전 특선작이 장욱진의 <공기놀이>(1938)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승동표의 입지를 짐작하게 한다.

승동표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이내 도일하여 일본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1938). 재학중 그는 독립미술전에 출품하는가 하면, 조선미전에도 출품했다. 그러면서 도쿄 유학 미술학도들의 모임인 백우회(白牛會)에 참여한 바, 곽인식, 이중섭, 임직순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는 1941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 분단시대의 예술과 은둔 - 승동표의 경우 해부터 평북지역에서 미술교사 생활에 들어갔다. 신의주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임용련의 후임으로 오산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오산학교에서 임용련의 후임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런 주목을 요한다. 6.25전쟁의 와중에 그는 월남하여 그만 이산가족의 대열에 들어갔다. 전북지역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그는 새로운 가정을 꾸몄고, 오랜 기간 교장직을 맡는 등 교육자의 인생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화가로서 그의 이름이 미술계에 각인된 계기는 지난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고 10주기 기념 회고전을 개최하면서였다. 과작이었던 그의 작가생활은 유화 90여 점과 드로잉 60여 점을 남겼다.

(2) 오산시절 임용련 백남순 부부화가와 승동표

승동표의 화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는 중요 인물은 바로 오산학교 시절의 스승인 임용련이었다. 임용련은 일제 강점하 최고 수준의 선진 미술교육을 받은 예일대학 출신이었다. 그가 귀국하여 이내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하던 해(1931) 이중섭이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니까 거장 이중섭의 배경에 임용련이라는 존재를 간과할 수 없듯이 화가 승동표의 인생에서도 역시 임용련이라는 존재를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임용련은 누구인가. 평남 진남포 출신인 임용련은 배재학교 재학 당시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수배당하게 되자 압록강을 넘어 만주 탈출에 성공했다. 18세 소년의 운명은 이렇게 하여 대반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남경에서 대학에 다니다가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의 도움으로 중국여권으로 미국행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임파(任波)라는 중국식 이름이 생겼고, 또 길버트 파임(Gilbert Pha Yim)이라는 미국식 이름도 생겼다. 그는 시카고를 거쳐 1926년 예일대학 미술대에 편입했다. 처음에는 80점 수준의 성적을 받다가 최종학년인 5학년에 이르러 회화와 구성 등 수강과목에서 100점의 성적을 받았다. 수석졸업이라는 영예는 1년간 유럽일주 여행 장학금 혜택으로 이어졌다. 1930년 파리에서 체류하다 미술 유학생 백남순과 만나 결혼했다. 최초의 여성 유화가였던 나혜석은 세계일주 여행중 파리에 일시 체류했지만, 백남순은 본격 미술 유학생으로 장기 체류중이었다.

해농(海?) 백남순(白南舜)은 1923년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양화과를 입학한 바, 나혜석에 이은 여성유화가의 본격적 탄생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조선미전에 <정물>(1925) 등을 출품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그의 꿈은 파리 유학이었다. 일찍 귀국하여 도불 준비를 하던 차, 드디어 1928년 봄 그는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리의 일본인 미술 유학생은 2백 명도 더 헤아리게 했는데, 조선인은 이종우 정도만 꼽을 수 있던 상황이었다. 백남순은 사립 미술연구소에 다니면서 제작에 열중한 바, 학비는 미국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오빠의 지원에 힘입은 바 컸다. 보스턴 거주의 오빠 백남용은 1947년 서윤복이 우승했던 보스턴 마라톤대회 당시 선수단 일행의 숙식을 제공했던 비화가 있다. 1930년 파리에서의 임용련과 백남순, 이들은 부모의 허락을 받고 세느강 하류의 에르블레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는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 최고 수준의 학벌과 서구 체험을 공유한 부부화가의 탄생이라는 획기적 사건을 의미했다. 에르블레에서 조금 더 하류로 내려가면 고암 이응노기념관이 있는 보 쉬르 세느 마을과 만나게 된다. 나는 고암사업을 도와주면서 임용련/백남순 부부가 신혼살림을 차렸던 에르블레 마을을 방문한 바 있다. 고색창연한 에르블레 성당은 아직도 이들의 결혼 증명 명부를 보관중이다.

1930년 임용련/백남순 부부는 귀국하여 11월 부부 귀국전시를 개최했다. 국내 최초의 부부 전시, 그것도 유화 전시여서 장안의 화제였다. 각자 30점의 작품을 진열한 이들 부부의 존재는 바로 조선의 보물이라고 평가를 받게 했다. 작품도 제법 팔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하 조선의 현실은 미술가의 활동무대가 거의 전무했다. 미술학교는 물론 미술관이나 화랑 같은 기구가 하나도 없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미술수업을 받고 귀국해 봐야 이들의 전공을 살릴만한 무대는 없었다. 그렇다고 미술시장이 형성된 것도 아니었고, 미술가에 대한 사회적 대우 또한 열악했다. 빵 문제로 고민하다 임용련 부부는 1931년 ‘임시’ 직장으로 정주행을 단행했다. 오산학교 시대는 이렇게 하여 펼쳐지기 시작했고, 결국 해방기까지 장기 체류하게 되었다. 1980년대 나는 뉴욕에서 거주했다. 마침 뉴욕으로 이주한 만년의 백남순 여사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오산학교는 외진 산골에 소재했기 때문에 교사가족은 물론 학생들도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단다. 때문에 주말만 되면 이들 부부는 미술반 학생들과 함께 야외 스케치를 다녔다고 했다. 당시 국제 미술계의 현황을 가장 잘 아는 최고 교육수준의 스승을 모신 미술반 학생들의 교육효과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같은 환경에서 이중섭이라는 존재가 탄생할 수 있었다. 백남순의 증언에 의하면, 이중섭의 피난시절에 은지화가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미 오산시절에 다루었던 재료라 했다. 작고 직전의 전시장에서 이중섭은 백남순에게 은지화 사용 방법을 알려주어 고맙다고 인사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임용련/백남순 부부가 존재하는 오산학교에서 미술반 학생들은 수준 높은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다. 승동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승동표가 일본 유학을 가면서 화가의 길로 입문할 수 있었던 배경에 임용련 부부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3) 승동표의 회화세계

월남작가 승동표, 그는 평생에 개인전 한 번 개최한 바 없다. 아니, 그는 미술계 활동조차 삼가면서 교육자의 길에 매진했다. 월남한 입장에서 북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염려했는지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들어 내지 않으려 했다. 대외적으로 화가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은 결과, 그의 조형언어는 미지의 세계에 잠겨 있었다. 이에 국립현대미술관 발행 개인 작품집에 의하면, 승동표의 회화세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유작의 작품 숫자는 많지 않지만 작품집에 수록된 유화 91점을 대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작연대로 살펴볼 때, 1950년대의 작품은 <자화상>(1954)을 비롯 4점, 1960년대는 12점의 유화작품을 헤아리게 한다. 하지만 1970년대의 작품은 볼 수 없고,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제작활동에 임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80년대의 작품 숫자는 62점이나 되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다. 반면 90년대는 13점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로서 보면 승동표의 유화작품 제작 관련 집중적 몰입시기는 1980년대임을 확인하게 한다. 80년대의 승동표는 1982년(65세)에 학교에서 퇴직했고, 1996년 79세로 별세할 때까지 노후기간에 해당한다. 역시 직장생활로부터 자유스럽게 되자 승동표는 이전 시기와 완전히 다르게 제작에 몰입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리라. 60-70대의 제작, 그는 노년에 이르러 창작의 불꽃을 활발하게 드높인 경우의 화가에 해당한다. 만약 젊은 시절부터 창작에 매진할 수 있었던 환경이었다면 상당수의 작품을 제작했을 것이고, 또 그 작품 가운데는 주옥과 같은 작품도 많았을 것이다.

승동표는 철저한 구상화가였다. 이들 유작의 소재별 분석을 시도하면 다음과 같다. 50년대의 작품은 <자화상>과 <아내>(1959)가 있지만, 나머지 작품은 정물화이다. 60년대의 작품은 약간의 인물화가 보이지만 대부분은 풍경화이다. 80년대 작품은 정물화와 풍경화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만년의 작품 경향도 유사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승동표는 약간의 인물화, 가족을 소재로 삼은 인물화가 약간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 소재는 정물과 풍경임을 알게 한다. 20세기 후반의 현대미술이라는 광풍(狂風)을 염두에 둔다면, ‘초지일관’의 자세를 지킨 화가라고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소재의 집착, 그것은 실험정신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고,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특정 소재에의 부단한 천착 기질로 집약할 수 있다. 승동표의 경우, 특이한 면은 소재뿐만이 아니다. 그의 화풍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화가 생애의 후반부는 그렇게 장식되어 있다.

승동표의 유화작품은 무엇보다 강렬한 원색의 구사를 주목하게 한다. 짙은 농채의 과감한 구사는 승동표 화풍의 특징이다. 원색을 다채롭게 활용하면서 윤곽선의 과감한 처리, 명암 대비의 강조, 그러면서도 굵고도 거친 필선은 승동표 작품의 특징을 이룬다. 이 대목에서 특기하게 하는 부분은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거의 유사한 화풍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렬한 터치와 색채 구사, 노년기에 이르러서도 섬약함에 빠지지 않고 강한 필선을 구사한 작품들, 이는 승동포 회화의 이색적 특성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조형기법은 그만큼 작가의 자신감에 따른 현상일 것이다. 힘에 넘치는 붓질과 원색의 과감한 구사, 거기에 담기는 정물과 풍경들, 승동표 회화세계의 특성이리라. 이 같은 조형어법은 아마 임용련의 어법과 맥락을 함께하는 것일지 모른다. 유작이 거의 없는 임용련의 경우, 자신있게 비교하여 단정지을 수 없게 하지만, <에르블레 풍경>이나 <금강산> 작품 등의 화풍과 비교한다면 그렇게 무관한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백남순의 병풍형식 유화 작품 <낙원>과 비교한다면, 상당부분에서 친연성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승동표는 평생 오산시절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살았다는 것일까. 승동표의 작품은 불행하게 살다 간 스승 임용련을 위한 헌사(獻詞)였던가.

(4) 승동표의 화단사적 자리매김을 위하여

망각의 화가 승동표, 하지만 이제 이와 같은 수식어는 불필요할지 모른다. 생전의 화가 자신은 의도적으로 작가활동을 제한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승을 떠났고, 작품은 남아 있다. 본격적 작품 평가 작업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에의 진입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북한 지역에 남아 있을 초기작품의 내역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작가의 평전 형식과 같은 생애의 복원을 시도해야 하리라. 유화 작품 이외 드로잉 작품의 분석도 요구되고 있다. 이 같은 종합적 시각에서의 연구는 승동표 세계를 보다 분명하게 들어내는 데 필요한 사항일 것이다.
승동표의 생애는 분단시대의 월남화가, 전북지역 중심의 교육자 활동, 그리고 은둔과 창작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분단의 의미는 특별하다. 월남 이후 공식적으로 화단 활동과 외면한 것은 승동표 내면세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교육활동에 더 몰두한 배경, 이를 주목하게 한다. 은퇴 이후 승동표는 창작열에 불타 상당수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작품 발표를 하는 등 미술계 진입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은둔자의 태도를 견지했다. 분단시대에 대응하는 삶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은둔은 사유를 낳게 했고, 작품 내용은 무게를 더해 갔다. 1936년 조선학생미전에서 특선 받았을 때, 스승 임용련이 ‘이해력 풍부’한 학생이라고 언급한 내용을 상기시킨다. 시대를 통찰하는 시각은 난세의 은둔자 위치를 갖게 했고, 이와 같은 태도는 말년에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이제 화단사에서 누락된 승동표라는 화가의 복권을 위한 조치가 필요한 때이다. 활기찬 필력으로, 과감한 원색의 구사로, 정물과 풍경을 장악하여 자신의 조형언어로 승화시킨 화가, 승동표의 발언은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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