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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사, 퍼즐맞추기 -승동표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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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2001년 07월 12일 (목)  
 
 
한국의 근대미술사는 미완의 역사이다. 대개가 그렇듯 미술사란 작품이 제작되던 당시의 시대상이나 정치, 경제, 문화등의 총체적 결정체이다. 따라서 그 당시를 풍미했던 작가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발굴되고 이들 작품을 분석하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미술사의 바른 서술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선조들은 당시를 이해하고 이를 역사로 구성할 수 있도록하는 기초적인 자료를 대부분 남기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역사를, 미술사를 논한다는 것은 실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승동표의 존재와 그의 작품 90여점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자료미비라는 이 같은 현실로인해 더욱 의미가 깊다. 

우리미술사에 있어서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유학해서 나름대로 새로운 회화적 기법을 체득하고, 귀국하여 자신의 조형적 언어를 어떻게 구축했는가를 추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전통적으로 그림하면 지필묵을 떠올렸다. 부드러운 모필 대신 거친 유화 붓은 우리에게 생경했고,‘닭똥같은’ 유화물감과 원근법은 마술과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사진술과 함께 들어온 새로운 문화로서의 세상을보고 기록하는 그림은 이제 더 이상문인화적 전통이나 진경산수적 입장을 떠나 새롭게 세상을 보는 방법을 제시해 주기에 충분한것이었다. 승동표는 이땅에서 사라진 존재였다. 

그는동경의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모교인 오산학교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 1.4후퇴 당시 남하하게 된다. 이것으로 그의 망각의세월은 사실 시작된 셈이다. 그는 중앙화단과는 일본에서 공부 할당시 가까이 지냈던 임직순을 비롯한 몇몇 화가와 교우하면서 일체의 공적인 미술활동을 제한한 채 스스로 칩거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육자로서의 삶을 일구어나갔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의 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가운데 틈틈이 정물화를 그렸고 전북 일대의 야일(野逸)한 산하를 미적 후각으로 더듬어 구석구석을 담아내었다. 그리고 사생이 불가능한 날이면 집에서 정물화나 스케치를 하였다..  이제 사람은 가고 이름 없이 남은 그림은 실은 그의은둔에 가까운 삶에서기인한다. -여기서 은둔이라 함은 작품발표를 일절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그림을 제외한다면 승동표는 이 세상을 다녀가지 않은 것과 같다. 그의 작업은 철저하게 남의 시선과 관점을 의식하지 않고자기수양의 입장에서 자신의 그림을 제작하였다. 그림을 통해서 명예를 얻고 지위를 얻고 부를 누리는 따위의 속인들의 삶과는 달리 자신의 내면을 다지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승동표에게 자신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게 한것은 고향을 두고 피붙이 하나 없는고장으로 떠나온 이산의 슬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교육자로서 자신에게 운명 지워진 삶의 조건에 순응하고자 하는 숙명적인 자세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승동표가 가고난 지금 그의 녹록하지 않은 작품 90여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커다란 하나의 선물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높고 깊은 역사의 고비를 넘어들면서 그는 마치 득도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로 작품을 해왔고그 작품이 이제 우리 눈앞에서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의 작품을 발견한 것은 1998년의 일이다.당시 본 작품은 <자화상>(1954년 작,유화>를 비롯한 수 점의 작품이었다. 물론 그의 초기작 즉 1940-50년대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몇 점의 작품에서 튼실한 구도와 대상을 분석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엄격한 작가적 태도 등이 우선 눈에 띄었다.  그의 작품의 진면목은 대상을 읽고 분석하고 이를 표현하는 세 단계를 명확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다보면 작가가 스스로 도취되어 작품의 견고함을 떨어뜨리고 감정에 휘몰려 그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는정말로 묵묵하게 자신이본 것을 마치 세잔느가 그러했던 것처럼 물체를 구와 원통, 원뿔로 분해하고 이를 다시 재조합하는 과정을 철저하게 지켜내었다. 이는 대부분의 일본에 유학하여 그림을 배워온 화가들이 속칭 자색파-보라색을 많이 쓴 르느와르 풍의그림-에 속하는 그림을 많아 그렸던데 반해 색채도 매우 절제되고 담백한 색을 아주 성실한 태도로, 일체의 흐트러짐 없이 터치 하나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대상을 분석적으로 보는 태도는 우리 미술사에 있어서 세잔느풍의 지적인 태도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우선 의미가 있는일일뿐더러 우리미술사에서 현대미술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생략된 입체파적 전통과 비추어 보아도 그 의미는 깊다.  그의 바위처럼 단단한 화면의 구축과 장식성이라고는 없는 단아한 색채구사는 가히 한국미술사에 있어서 그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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