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승동표
 
운봉소개
현재위치 HOME > 관련기사
[온누리]운봉 승동표
관리자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승동표의 존재와 그의 작품 90여점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자료미비라는 현실을 극복하는 계기다. 우리에게는 전통적으로 그림하면 지필묵을 떠올렸다. 부드러운 모필 대신 거친 유화 붓은 우리에게 생경했고,‘닭똥같은’ 유화물감과 원근법은 마술과도 같은 존재였다.(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정읍중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학생들은 기억한다. 선생님은 잘못 그렸다고 지적하신 적이 없었음은 물론 항상 격려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이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창의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던 같다. 그 자유스러운 수업 분위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에게 미술시간이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유종근 전 전북도지사)

2001년 본지에 의해 처음 공개된 <2001년 7월9일자 1면 보도> 서양화가 운봉(雲峰) 승동표화백(1918~1996)의 작품들이 유족들의 기탁에 따라 21일부터 다시금 도민들을 찾아간다. 천재화가 이중섭과 함께 한국 근대미술계의 버팀목으로 주목 받았던 승화백의 작품은 드문드문 비어있는 근대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낙질이었다. 좀처럼 메워지지 않던 근대 미술에 대한 연표는 승화백의 작품들로 인해서 온전히 완성된다. 

그는 오산학교 재학 시절 ‘제1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36년)에서 최고상인 특선을 함으로써 가능성을 보였다. 스승인 임용련 선생의 권유로 일본에 유학,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의 ‘독립미술전’ 등에서 3회 연속 입선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한국전쟁때 월남, 30여년간 도내에서 교편을 잡았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지만 34세 때인 1951년 정읍으로 월남, 이후 세상을 뜨기 전까지 46년간 전북에 뿌리내리고 살았다.

한국의 근대미술사는 미완의 역사다. 상당부분 퍼즐맞추기를 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부분이 많다. 드문드문 갖춰진 윤곽에 빠진 부분을 구체적으로 메워주는 이가 승동표 화백이다. 단지 우리고장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았던 예술인이라 해서 무조건 우러르자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 고장은 이런 웅숭깊고 꼿꼿한 인걸을 길러왔다. 봉황을 품는 둥지와 호랑이를 기르는 숲이 아직 남아있다. 그래서 변해도 많이 변한 인심이지만 옛 인걸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이강록 부국장

새전북신문 2008년 04월 17일 (목) 22:17:53
글목록
 
 
운봉소개 운봉연보 운봉작품 운봉사진 관련기사 감상후기 관리자메일 운봉승동표